'세종대왕' + 2
- 비정한 왕 영락제와 세조, 비운의 왕 건문제와 단종 45 2015.12.31
- 세종대왕과 광개토대왕, 한국 역사의 두 위대한 대왕 38 2015.10.13
'피는 물보다 진하다' 라는 말은 예로부터 끈끈한 가족간의 유대를 나타내는 말로 쓰여왔는데요. 때로는 피보다 권력이 더 진한 경우가 역사적으로 상당수 있었었답니다. 이번엔 권력을 가지기 위해 가족을 버린 두 명의 인물을 소개해볼까 해요.
명나라 영락제조선 세조
바로 중국 명(明)나라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3대황제 영락제와, 조선 초기의 국가 체제를 완비한 7대왕 세조 입니다. 이 두 명의 제왕들은 모두 이미 왕위에 올랐던 조카를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하는 비정한 모습을 보이는데요.
참 아이러니컬 하게도 영락제와 세조 모두 각각 초기 명나라와 조선의 기틀을 다잡은 능력있는 왕으로 역사적으로 평가되고 있답니다.
명나라 건문제조선 단종
숙부인 영락제와 세조에게 쫓기 듯이 왕위를 찬탈당한 비운의 주인공들이 각각 명나라 2대황제 건문제와, 조선 6대왕 단종이랍니다. 사극이나 소설의 단골 주제로서 한번쯤은 들어본 낯이 익은 이름들일 거라고 생각되네요. 건문제나 단종 모두 비슷한 과정으로 최후를 맞이하였답니다.
건문제는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장손자 인데요. 황태자였던 아버지가 죽자 주원장은 본래 후계자로 4남인 연왕 주체(영락제)를 생각하였지만, 적통의 원칙을 주장하는 신하들의 반대로 주윤문(건문제)을 황태손으로 책봉하게 되죠.
건문제는 온화한 성품으로 황위에 오른 후에 필연의 과정이었던 숙부들과의 세력 다툼에서 소극적으로 임했는데, 결국 연왕 주체(영락제)가 '정난의 변'을 일으키게 된답니다. 북경을 기반으로 북방의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진 군대를 보유한 연왕 주체의 반란군이 오히려 우세했었었죠.
[kokjin.blogspot.com]
무엇보다 뒤가 없었던 연왕 주체(영락제)에 비해 '숙부님의 생명까지 위협해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 몰아붙이지 마라' 라며 유약한 모습을 보인 건문제의 태도가 문제였었다고 해요. 실제로 건문제의 관군이 결정적으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절호의 기회를 놏치고 만답니다.
영락제 [panoramio.com]
3년간의 전쟁 끝에 수도 남경을 함락시킨 후, 1402년 마침내 연왕 주체는 영락제로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게 되는데요. 그리고 수도를 본거지였던 북경으로 천도를 하게 되죠. 건문제는 남경이 함락되기 직전 불을 지르고 이후 행적이 사라지고 말았답니다.
행방이 묘연하다 보니 건문제의 최후에 대해선 각종 설들이 많은데요. 불에 타 죽었다, 양자강에 투신했다, 도사가 되었다, 승려가 되었다가 나중에 신분이 알려져 북경에서 살았다 등등.
건문제를 찾기위한 여정?[notcomment.com]
심지어는 역사적인 대항해였던 정화의 대원정 조차도 사라진 건문제를 찾기 위함이었다는 설도 있다고 해요. 건문제의 최후는 명나라 최대의 미스터리로서 각종 문화장르의 대표적인 주제로 다루어졌죠.
KBS 드라마 왕과 비' 단종
건문제의 닮은꼴인 단종은 세종대왕의 왕세손으로서 어린시절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었답니다. 처음부터 세종대왕은 병중인 자신과, 병약한 첫째 아들 문종으로 인해 어린 이홍위(단종)의 미래에 대해 많은 걱정을 했었는데요.
특히,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했던 자신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을 꼭 닮은 둘째 아들 수양대군 이유(세조)에 대해 걱정이 많았고, 김종서 등 심복 신하들에게 단종을 부탁하게 됩니다.
신숙주숙주나물
이 중 한 명이 세종대왕이 아꼈던 신숙주 였는데, 그는 후에 변절하여 수양대군(세조)의 편에 가담하게 되죠. 후대에 이를 조롱하며 빨리 쉽게 맛이 변하는 녹두나물에 숙주나물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답니다.
세종대왕의 뒤를 이은 아버지 문종이 2년여 만에 요절하고 단종이 왕위에 오르지만, 수양대군(세조)은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 1455년 사실상 반강제로 조카 단종으로 부터 양위를 받아 왕이 되는데요.
KBS 드라마 왕과 비' 수양대군
정통을 중요시하는 조선의 유교사상에서 반하는 행동으로 집권 초기 많은 반발을 사게 됩니다. 세종대왕의 유지를 이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한 여섯명의 충신을 이르는 사육신 사건이 가장 유명하죠.
KBS 드라마 사육신
이래저래 단종을 명목으로 한 반정이 이따르자 세조는 결국 조카 단종에게 죽음을 내리게 된답니다. 자살했다는 기록과 사약을 내리러 간 의금부 도사가 망설이자 모시던 종복이 목졸라 죽였다는 기록도 있는데요.
단종묘 장릉 [78ktx.co.kr]
세조의 노여움이 무서워 방치되었던 단종의 시신은 강원도 영월의 호장이었던 엄흥도가 수습을 하게되고, 그는 벼슬을 내놓고 숨어 살았다고 해요. 영조 때는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정문이 세워지기도 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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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만년 한국 역사를 통틀어서 대왕(大王)으로 불리는 위대한 두 명의 왕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시한 문(文)의 상징으로서, 광개토대왕은 광활한 만주를 정복한 무(武)의 상징으로서 오랫동안 우리들의 가슴 속에 기억되고 있죠.
가정을 한번 해볼게요. 한국의 위대한 대왕을 뽑는 선거에서 두 분중 한분에게 투표를 해야한다면, 과연 여러분의 선택은?!
2. 세종대왕(조선 제4대왕, 재위 1418년~1450년, 본명 : 이도)
조선시대를 넘어서, 한국 역사 전체를 훑어보더라도 이처럼 수많은 업적을 남긴 왕은 아마도 없을 거에요. 무엇보다도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 불리는 훈민정음 창제만으로도 한국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왕으로서의 이유가 충분하죠.
1972년 이후, 40년 넘게 만원권 지폐의 초상화 인물
[우등생전과, 천재교육]
1446년 10월 9일 훈민정음 창제 (한글날의 역사)
세종대왕이 위대한 성군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경제, 과학, 군사, 문화, 외교, 예술, 법, 정치 등 국가경영의 모든 분야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랍니다. 이 때문에 문물의 발전도 큰 폭으로 이뤄졌었죠.
혼천의 www.dongascience.com
측우기 scienceon.hani.co.kr
물시계(자격루)
해시계(앙부일구)
뛰어난 발명가 장영실이 참여해 제작된, 혼천의(천문 관측기구), 측우기(강우량 측정기구), 자격루(물시계), 앙부일구(해시계). 김종서장군과 최윤덕장군의 여진족 토벌 4군6진 개척으로 영토확장. 이종무장군의 대마도정벌(왜구토벌)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신원문화사]
대동여지전도, 이종무의 대마도정벌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정책연구기관 집현전의 설치, 재상의 등용 및 의정부 서사제로 국정의 효율화, 명나라에의 처녀·금·은 조공을 말과 포(布)로 대체 합의, 속육전 등 법전정비, 유교 정치의 기틀마련, 농사직설(농서)·용비어천가(악장)·의방유취(의서)·삼강행실도(윤리서)·고려사(역사서) 등 각 분야의 서적 편찬
집현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용비어천가
세종대왕의 업적들은 너무 많지만 대표적인 것만 추려 봤어요. 이 외에도 백성의 복지정책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는 점(심지어 장애인까지도), 신분에 구애 받지 않는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도 빼놓을 수 없는 점 이랍니다. 이정도면 하늘이 내린 임금님이 맞지 않을까요?
정인지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성인으로서 제도와 시설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 행위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 예조판서 정인지, 훈민정음 서문 中 -
광개토대왕 동상 www.funasia.co
1. 광개토대왕(고구려 제19대왕, 재위 391년~412년, 본명 : 담덕, 연호 : 영락)
대륙과 바다가 만나는 천혜의 위치는 한국의 역사를 침략으로 점철되게 만들었지만, 단 한번! 우리 민족이 대륙의 패자로서 정복자의 입장에 섰었던 적이 있었죠. 바로 삼국시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때 입니다.
광개토대왕비 www.ingopress.com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칭호로, 중국과 일본에는 호태왕(好太王)으로 널리 알려져 있답니다. 이는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된 사실이었는데, 이 때문에 최근에는 광개토태왕으로 더 많이 불려지고 있답니다. '광개토경'의 의미는 나라 땅을 넓힘이에요.
광개토대왕 고구려 기마대 (태왕사신기)
백제 아신왕의 항복 (태왕사신기)
당시 우리민족은 삼국시대 였었는데, 일찍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백제는 광개토대왕에 의해 왕도였던 위례성이 포위당하고, 백제의 아신왕이 '지금 이후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 는 항복을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답니다. 신라는 백제와 왜의 침공으로부터 고구려의 구원을 받은 이후, 사실상 신하국이 되었죠.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김용만, 도서출판 창해]
광개토대왕의 정복 및 고구려 영토 (정사 正史)
'환단고기'에서의 광개토대왕 고구려 영토
*환단고기는 민족사학으로서 그 진위여부에 대해 아직 논쟁이 있습니다. 참고만하세요.
북방으로 눈을 넓히면, 후연과의 전쟁을 승리하여 요동 장악. 끈질겼던 북부여·동부여의 정벌, 북방민족인 거란·숙신(말갈)족 정벌 등을 통해 마침내 만주의 패자로 등극하게 되는데요. 당시 중원을 지배하던 남조/북조, 몽골초원의 지배자 유연과 함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좌지우지하게 된답니다.
[민족기록화]
그렇다고 광개토대왕이 정복전쟁만 하는 잔혹했던 왕은 또 아니었었어요. '평안호태왕'이라는 칭호에서 알 수 있듯이 나라를 평안하게 잘 다스려서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았었던 왕이랍니다. 행정조직의 정비 및 개편을 단행하였고, 법령의 정비, 신앙체계의 정비 등 내치에도 힘썼었다고 하네요.
[MBC 느낌표 배포지도]
동북공정으로 중국 역사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는 고구려. 마찬가지로 광개토대왕도 호태왕으로서 중국 한 지역의 패자로 평가절하되고 있는데요. 한민족의 진취적 기상을 드높였던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우리가 잊어서는 절대 안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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